우리는 흔히 도시는 지면 위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층 빌딩과 도로, 광장이 도시의 전부처럼 보이지만, 세계 곳곳에는 땅속 깊이 숨겨진 또 다른 도시들이 존재합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는 다양한 이유로 지하 공간을 파고 도시처럼 활용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세계 여러 나라의 대표적인 지하도시들을 소개하고, 그들이 어떤 역사적 기능을 수행했는지 탐구합니다.
터키 데린쿠유: 고대의 거대한 피난처
지하도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단연 **터키의 데린쿠유(Derinkuyu)**입니다. 이곳은 터키 중부 카파도키아 지역에 위치한 거대한 지하도시로, 8층 이상의 깊이와 최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를 자랑합니다. 고대 히타이트 시대부터 비잔틴 제국까지 오랜 시간 동안 확장되었으며, 전쟁이나 종교 박해로부터 주민들이 피신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내부에는 거주 공간, 학교, 교회, 식량 저장고, 환기통로 등 도시의 모든 기능이 갖춰져 있었고, 바위문과 은닉 통로로 외부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라, 장기간 거주가 가능한 생존공간으로 기능한 데린쿠유는 지하도시가 가진 방어적 역할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중국 베이징 방공 지하도시: 현대 냉전시대의 유산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한때 ‘지하 만리장성’이라 불리던 **방공 지하도시(Dixia Cheng)**가 존재했습니다.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이 시설은 핵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조성된 일종의 군사적 피난처였습니다. 30만 명 이상의 자원봉사자들이 손으로 파낸 이 지하도시는 85제곱킬로미터 규모로, 병원, 극장, 학교, 침실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냉전시대 핵전쟁 공포 속에서 태어난 이 도시는, 현대 지하공간이 군사적 용도로 발전한 사례로 의미가 깊습니다. 현재는 대부분 폐쇄되었으나, 일부 구역은 박물관처럼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당시의 정치·군사적 배경을 보여주는 교육 장소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호주 쿠버 페디: 땅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지하도시가 단지 과거 유물만은 아닙니다. **호주의 쿠버 페디(Coober Pedy)**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현대 지하 거주지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오팔 광산으로 유명한 지역인데, 사막의 극심한 더위와 모래폭풍을 피하기 위해 주민들이 땅속에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지하 교회, 상점, 호텔, 미술관까지 마련되어 있으며,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지하에 거주할 정도로 생활이 정착되어 있습니다. 쿠버 페디는 현대 기술과 전통적인 적응 전략이 결합한 지하도시 사례로, 기후변화 시대 대체 거주 모델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카타콤: 죽음을 품은 지하의 미로
**파리의 카타콤(Catacombs of Paris)**은 유럽 지하도시의 또 다른 유형을 보여줍니다. 18세기 후반, 인구 증가로 파리 시내 공동묘지가 포화되자, 당국은 시 외곽의 석회암 채석장에 무려 600만 구 이상의 유골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하 통로는 300km 이상 뻗어 있으며, 일부는 예술적으로 정돈된 유골 벽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한 유골 저장 공간이었으나, 이후 프랑스 혁명과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군의 은신처, 비밀 회합 장소로도 사용됐습니다. 현재는 관광객에게 개방된 일부분만 출입 가능하며, 죽음의 역사와 도시 구조의 이면을 보여주는 독특한 역사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핀란드 헬싱키: 지하도시의 미래형 모델
현대 지하도시는 방어와 피난처의 개념을 넘어, 도시 인프라의 연장선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핀란드 헬싱키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헬싱키는 극한의 겨울 기후와 안전을 고려해 지하에 쇼핑몰, 수영장, 주차장, 데이터센터, 교통 터미널 등 다양한 기능의 공간을 조성했습니다. 이 도시의 지하 개발은 단순한 연장선이 아니라, 설계 단계부터 통합된 ‘이중 도시 구조’로 설계되었습니다. 냉전시대 핵전쟁을 대비한 방공 대피소 역할도 여전히 유지되며, 필요한 경우 신속하게 전환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헬싱키는 지하공간을 도시 전체와 연계한 미래형 모델로, 지속가능한 도시 설계에서 주목받는 사례입니다.
지하도시의 공통된 기능과 오늘날의 의의
이처럼 세계 각국의 지하도시는 다양한 시대와 이유 속에서 조성되었지만, 공통적으로 피난처, 보호 공간, 대체 거주지, 비밀 공간, 그리고 도시 인프라의 확장이라는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데린쿠유는 외부 침입에서의 방어, 쿠버 페디는 혹독한 자연환경의 극복, 파리 카타콤은 인구 증가에 따른 위생 문제 해결 등, 시대의 과제를 땅속에서 해결하려는 인류의 지혜가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지하도시가 단순한 유산이 아닌, 기후위기나 에너지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더운 지역은 열을 피하기 위해, 추운 지역은 에너지 효율을 위해 지하로 눈을 돌리고 있으며, 고밀도 도시에서는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도 활용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지하 공간은 재해 대피소나 데이터 저장소로도 기능할 수 있으며, 미래형 스마트시티에서 핵심 역할을 할 가능성도 큽니다.
결국 지하도시는 인간이 자연환경과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또 하나의 도시 형태였습니다. 그곳에는 인간의 두려움, 생존 본능, 그리고 적응력이라는 위대한 서사가 숨어 있습니다.